벼루에 물을 갈 때마다 세상 소리가 잠시 멎었다.
원손(元孫)이 그리 말한 것이 아니라, 먹을 가는 동이(童伊) 자신이 그리 느꼈다. 벼루의 움푹한 자리에 물이 고이고, 먹 막대기가 둥글게 원을 그리기 시작하면, 마당 너머 까마귀 울음도, 사랑채 쪽에서 들려오는 나리의 기침 소리도, 어딘가 아득해졌다. 먹물이 번지듯 세상이 번져 흐릿해지는 것이었다.
동이는 열여섯 살이었다. 정확하게는 열여섯인지도 몰랐다. 거두어준 최 진사 댁에서 그리 불렀으므로 그리 알 뿐이었다. 이름 또한 마찬가지였다. 동이, 동이. 아이라는 뜻이거니 했는데, 정작 나이가 들어도 동이였다. 그 집의 개는 황구(黃狗)라 불렸고, 소는 점박이라 불렸으나, 그 이름들에는 적어도 생김새가 담겨 있었다. 동이라는 이름 속에 동이가 있는지, 동이는 알지 못했다.